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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튜디오 ‘사물의 언어’ 양정은 2022.03.29

    그래픽 디자이너 양정은이 ‘진짜 내 것’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들


    인터뷰 임재훈

    발행일. 2022년 03월 29일

    스튜디오 ‘사물의 언어’ 양정은 2022.03.29

    그래픽 디자이너 양정은에게는 ‘몬드맘’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아몬드의 엄마라는 뜻이다. 견과류 스낵 브랜드 바프(HBAF, Healthy But Awesome Flavors)의 대표 상품군인 아몬드 시리즈 패키지 디자인을 양정은이 작업했기 때문이다. 상품 자체가 소비자들에게 친밀한 간식류인 데다 마케팅도 잘된 히트작이다. 톱 배우 전지현이 “H는 묵음이야”라고 말하던 2021년 광고도 유명하다.
    
    여기에 더해 2016년 iF 디자인 어워드와 K-디자인 어워드, 이듬해 독일 디자인 어워드 및 A’ 국제 디자인 어워드 수상 이력도 있다. 상업적 성공을 거둔 상품이 패키지 디자인으로도 국내외에서 실적을 거둔 셈이다. 이즈음부터 양정은은 몬드맘으로 불리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렀다. 아몬드 시리즈는 적어도 아몬드 계통에서는 독보적이라 할 만큼 대중성을 유지하고 있고, 새로운 맛(flavor)이 한 종 한 종 추가되는 만큼 양정은의 아몬드 포트폴리오도 착실히 쌓여가는 중이다.
    
    그러므로, 이번 인터뷰에서만큼은 아몬드를 잠시 치워두어도 될 것 같다. 『타이포그래피 서울』 에디터가 아몬드(를 비롯한 견과류 일체)를 즐겨 먹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일러스트레이터, 수 차례 전시를 연 아티스트, 스튜디오 운영 10년차를 바라보는 양정은의 모든 활동과 고민을 130그램 용량의 견과류 스낵 한 봉지로만 담아내기가 태부족이었던 탓이다. 아몬드의 엄마일 뿐 아니라, 양정은은 자신 안의 많은 것들의 주인이었다. 자신이 그것들의 주인임에 대단한 책임감을 가진 크리에이터였다.
    HBAF 아몬드 스낵 시리즈 패키지 및 캐릭터 디자인, 일러스트레이션, 2015~현재
    양정은의 스튜디오 ‘사물의 언어

    디자이너와 인터뷰를 진행하는 대화자 혹은 질문자의 입장에서, 인터뷰이가 ‘개인전’을 열어본 인물일수록 궁금한 게 많아집니다. 호기심이 인다고 할까요. 이상한 말처럼 들리실 수도 있겠습니다. 클라이언트잡도 충분히 흥미롭지만, 그보다는 오롯이 ‘나’를 관객 앞에 드러내는 개인전의 면면을 볼 때 ‘말을 좀더 많이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그래픽 디자이너 양정은과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도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학교 동문(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인 제갈선 작가와 세 번의 2인전을 진행하셨습니다. 〈읽을 수 없는 자(Unreadable)〉, 〈언릴레이션(Unrelation)〉, 〈미정의 말(Yet to be Said)〉. 이렇게 이어지는 일종의 시리즈 전시인 줄로 압니다. 시각 영역을 전공한 두 작가가 계속 텍스트와 언어에 천착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이 두 작가는 읽힐 수 없고 말해질 수 없는, 미정의 글말들을 시각화해보려는 시도를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세 전시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바가 무엇이었는지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학부, 석사 동기인 제갈선 작가와는 언어와 텍스트라는 공통된 관심사를 갖고 전시를 함께 진행해 왔습니다. 5년여 동안 순차적으로 진행된 세 전시의 주제는 어떻게 보면 언어가 지닌 순기능을 역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자연스레 인식하고 있는 ‘말’의 방향성을 부정함으로써 관객들에게 말 자체의 본래 의미를 되새기게 하고, 각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싶었어요. 다만 제 경우는 그 메시지를 관객들에게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작품을 봐주시는 분들이 제 의도를 공감해주시면 좋고, 이에 더해 각자의 기억과 생각의 생산이 이뤄지는 것을 더 추구하고 있어요.

    제갈선 작가가 간결하고 담백하게 유희를 표현한다면, 저는 내러티브를 기반으로 작품을 전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 전시의 작품들은 각 전시별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그와 동시에, 모든 전시작들은 각 전시 안에서 서로 서사적으로 연결됩니다. 언어의 기능 중 하나인 관계성에 집중하고, 던져진 주제를 통해 발생할 수 있는 인과 관계를 묘사하고자 한 의도였어요. 저는 시각이라는 것을 눈으로 보이는 어떤 ‘멋’으로만 규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제게 시각이란 ‘관계성을 전달하는 수단’이에요. 여기에 더하여 세 전시에선 텍스트라는 일종의 언어 기호를 관계성의 한 방법론으로 제시했습니다.

    스튜디오 이름인 ‘사물의 언어(Something Word)’는 마치 책 제목 같기도 합니다. 그래픽이 되었든 일러스트레이션이 되었든, 모든 작업물은 결국 ‘언어’의 한 종류임을 선언하는 듯한 느낌입니다. 디자인 요소들을 통칭하는 ‘시각 언어’라는 관용적 표현도 존재합니다만, 왠지 ‘사물의 언어’의 ‘언어’는 디자이너 양정은의 독자적 표현처럼 읽히고 들립니다. ‘Language’가 아니라 그 하위 단위인 ‘Word’를 사용한 점도 특이하고요.
    앞서 얘기 나눠본 〈읽을 수 없는 자〉, 〈언릴레이션〉, 〈미정의 말〉과 ‘Something Word’는 동일한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런 추측도 해보게 됩니다. “언어는 나타날 듯 말 듯 애를 태우는 원초적 장면이다.”라는 소설가 파스칼 키냐르의 문장(장편소설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중)도 불현듯 떠올랐고요.
    ······그래서 이 질문을 꼭 드려보고 싶었습니다. 디자이너 양정은이 정의하는 ‘사물의 언어’란 무엇인가요. 혹은, 무엇이 ‘사물의 언어’가 될 수 있나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질문에서 유추해주신 것이 대부분 맞습니다.(웃음) 실제로 『사물의 언어』(데얀 수직 저)라는 디자인 서적도 있고요. 스튜디오 이름을 책 제목에서 따온 것은 아니고, 2020년에 스튜디오명을 새로 지으면서 포토그래퍼인 성의석 작가님께 작명 의뢰를 하고 지금의 ‘사물의 언어’로 결정했습니다. 스스로를 한 단어, 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데 한계를 느끼다 보니 타인의 시선을 더 신뢰하게 되더라고요. ‘사물의 언어’ 전에는 7년 넘게 ‘개념공감’이라는 스튜디오명을 사용했습니다. 제가 추구하는 두 가지 작업관(개념과 공감)을 결합한 네이밍이었어요.

    그래픽 디자이너로 여러 분야를 구경해 오면서 느낀 게 있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다양한 수단들은 당연히 융합·복합되어 있다는 것, 날이 갈수록 융복합의 방식이 심화되고 그로써 새로운 무언가가 창출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라는 사람도 사고가 꽤나 복합적인 편이거든요. 그래서인지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동안 그래픽에만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시각 언어를 폭넓게 활용하는 작업에 흥미가 커졌습니다. 자연스럽게 ‘시각 언어로써 경험을 생산해내는 스튜디오’를 지향하게 되었고, 이러한 방향성을 담아 ‘개념공감’에서 ‘사물의 언어’로 변화를 준 것이었어요.

    ‘사물’은 물성이 있는 가시적인 영역을, ‘언어’는 앞서도 말씀드렸던 만져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관계성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언어의 요소요소, 즉 관계성을 성립시키는 낱낱의 언어 기능에 집중한다는 의미로 통념적 의미의 language 대신 word를 사용한 것이고요.

    제가 정의하는 ‘사물의 언어’는 이렇습니다. ‘무엇이든 고유의 언어를 지니며, 언어를 통해 표현하고 소통한다.’ 작업물이든 경험이든, 무엇이든 사물의 언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언어를 만들어주려는 사람일 수 있고요.(웃음)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 학생들이 ‘모교 선배 양정은’을 아주 심층적으로 인터뷰했더라고요. 이화여대 공식 블로그에 게재된 인터뷰 포스트에 “작업 자체를 시작할 때 좀 개념적으로 접근한다”라는 답변이 눈에 띄었습니다. 개념적 접근이라는 건 그러니까 구체성보다는 추상성과 관념성을 모티프(motif) 삼아 작업을 구상한다는 뜻인가요? 부연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개인 작업이든 클라이언트에게 의뢰받은 작업이든 핵심적으로 표현되어야 할 ‘본론’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제 경우엔 그 본론에 가 닿는 방법이 개념적 접근이에요. 작업의 가장 근본이 되는 지점, 본질, 본바탕 안으로 들어가서 사고하는 것이 항상 작업의 시작입니다.

    예를 들면 ‘이 작업이 전달해야 할 단 하나의 메시지’, ‘클라이언트의 정확한 니즈’, ‘작업을 통해 나타나야 하는 것 혹은 목표’ 등을 제 사고와 동기화시키는 것인데요. 그러자면 작업의 본론을 제 사고 안에서 개념화하는 단계가 필요합니다. 처음 마주하는 작업들의 메시지와 주제는 늘 낯설게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최종 산출물로 구체화하기 전이니 당연히 추상적으로 인지됩니다. 비교적 낯익고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비교적’인 인상입니다. 어쨌든 낯섦과 새로움을 상대해야 하죠. 반면에 작업 앞에 선 디자이너 양정은은 저에게 더없이 익숙하고 구체적인 존재잖아요. ‘나 자신’이니까요.

    그래서 자기 자신을 다양한 작업들, 즉 낯선 관념들의 코어에 위치시키려면 자신의 사고틀을 유연히 바꿀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 그 관념들 속에서 제 사고와의 접점을 찾아내 본딩(bonding)을 시도합니다. ······개념적 접근이란 말하자면 이런 과정이에요. 일단 개념적 접근, 그러니까 작업과의 본딩에 성공하고 나면 이후 과정에서 길을 잃거나 연결성이 끊기는 경우를 방지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러면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본론’과 어긋나 너무 자의가 되진 않는지, 작위적으로 흘러가진 않는지를 살피는 일입니다.

    앞서도 이야기 나눴던 것처럼, 저는 디자인(가시적 시각 표현)을 관계성의 전달 수단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작업의 근본적인 개념을 구체적으로 시각화하는 중간 과정의 인과 관계에 가장 집중을 많이 하고, 적합한 표현을 위해 정말로 다양한 방법을 이용합니다. 이런 과정들을 잘 연계해 밟아 나가다 보면, 좋은 결과물은 어느 정도 따라온다고 믿고 있습니다.(웃음)

    독립영화 전용관 인디스페이스 개관 9주년 기획전 〈멀티채널 시대의 독립영화: 내 손 안의 영화, 극장 밖의 영화〉 포스터, 2016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 제13회 전시 〈tE13: 사진과 타이포그래피〉 참여작 [쑥쑥], 2018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 제14회 전시 〈만질 수 없는(Contactless)〉 참여작 [없음이 없을무], 2020

    “정말로 앞길을 가야 하는데 앞길이 막막하고, 이젠 정말 내 것을 찾아야 하는데 하면서도 내 작업을 했을 때 누군가 컨펌을 해줄 사람이 없고, 제가 알아서 해야 하는 상황이잖아요.”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 유튜브 콘텐츠 [조예 깊은 인터뷰] 양정은 편(1부, 2부) 중

    대학원 졸업 후의 심경을 이렇게 회고하셨던데요. 저만의 생각입니다만, 대부분의 어른들이 비슷한 상황을 하루하루 한 해 한 해 살아가지 않나 싶습니다.(웃음) 디자이너 양정은의 ‘지금’은 어떨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내 것’을 찾으셨나요? 혹시, 독립 후 스튜디오를 오픈한 일이 ‘내 것 찾기’를 위한 발판이었던 건가요?

    말씀대로 대부분 어른들의 마음이 맞지요.(웃음) 저 당시의 심경은 막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오롯이 스스로에 대한 책임자가 되었다는 게 포인트였어요. 지금까지도 상황만 다를 뿐 매일 비슷한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런 하루하루와 경험들이 저절로 독립심을 지속적으로 키워주는 것 같아요. 예술 영역의 창작자들에겐 자신만의 스타일이나 방식을 찾고 설정해 나가는 것이 가장 큰 과업일 테죠. 저도 학생 때부터 스스로에게 던졌던 과제였습니다만, ‘내 것 찾기’란 결국 평생 해 나가는 일인 것 같네요.(웃음)

    회사를 나와서 생각보다 일찍 스튜디오를 오픈한 일도 ‘내 것’을 찾기 위한 큰 그림의 출발이었습니다. 하지만 클라이언트업을 기본으로 삼고 활동하는 디자이너로서, 초반에는 혼자 고생도 많이 하고 어수선한 경험들도 많이 하느라 ‘나’라는 건 온데간데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분들처럼 번아웃도 오고, 어떻게든 나만의 작업을 해보겠다며 뭔가를 시도했다가 연거푸 실패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지속했던 것 중 하나가, 앞서 얘기한 제갈선 작가와의 전시였어요. 그래픽, 일러스트레이션, 독립 출판, 마켓 참여 등 나름 여러 가지를 시도해보면서 저 자신을 파악해 온 것 같습니다.

    지금은 다행히 내 것이 찾아지고 있는 중인 듯합니다. 그전까지는 여러 갈래를 통해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탐색하는 과정이었다면, 요즘 들어서는 그 시간들을 거치며 얻어낸 깨달음과 결론을 우선적으로 집약시키고 있습니다. 나에게 더 맞는 것, 버려야 하는 것, 더 중요한 것, 인정해야 하는 것 등 스스로를 객관화하고 집중하는 데 몰두하는 중이에요. 때로는 민망하고 자존심 상할 수 있지만, 그것도 정면으로 마주하고 인정해야 ‘진짜 나’를 찾아갈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제가 펜 일러스트레이션을 좋아해서, 최근 들어서는 ‘내가 그리고 싶은 걸 그려보자’는 자세로 NFT 발행도 시작해봤습니다. 지금까지의 디자인 포트폴리오를 토대로 더 심화시키고 싶은 영역을 설정해서 스튜디오의 방향성을 세밀하게 잡아보고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2020년 스튜디오 이름을 ‘사물의 언어’로 바꾼 결정이 ‘내 것 찾기’의 시작이었던 것 같네요.(웃음)

    양정은이 발행한 NFT, 2022

    패션 브랜드 우석(WOOSUK)의 브랜딩 및 룩북 작업이 인상적입니다. 룩북을 위한 사진 촬영 세트 디자인과 디렉팅도 담당하셨던데요. 긁히고 까진 어두운 벽, 흠집 나고 깨진 바닥 타일, 그 위에 모로 뉘여 있거나 모델의 손에 들리거나 한 목재 스툴의 조합이 독특했습니다. 어수선하고 비정형적인 프레임 안에서, 뭔지 모를 화음이 어쨌든 성립되는 듯한, 쇤베르크의 음악 같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기묘한 이미지였습니다. 쓰러진 스툴에 엉거주툼 걸터앉은 모델의 이미지가, 스툴을 똑바로 세우고 앉아 포즈를 취한 모델의 이미지보다 오히려 안정적으로 보이기까지 했어요. ‘상처 받은 반항아들을 위한 럭셔리 브랜드’라고 저 혼자 맘대로 생각했습니다.(웃음) 브랜딩과 룩북 작업의 코멘터리를 요청드려도 될까요?

    일단, 제가 의도한 분위기를 너무 잘 묘사해주고 계셔서 반대로 제가 감동했습니다. 기묘한 느낌은 부수적으로 넣고자 한 것이었는데 그것까지 알아주셨네요.(웃음)

    우석은 2021년 FW 시즌을 첫 콜렉션으로 선보이며 론칭한 디자이너 브랜드입니다. 저는 로고 아이덴티티를 비롯한 전반적인 브랜딩과 그것을 위한 첫 시즌의 룩북 작업을 맡았어요. 처음부터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콘셉트를 내세워 브랜드를 만드는 경우보다, 클라이언트에게 내재된 기호(嗜好)나 정체성을 끄집어와 객관화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쓰게 되는데, 그런 종류의 프로젝트였습니다. 아까 이야기했던 ‘개념적 접근’이 몹시 중요했던 작업이었어요.(웃음)

    오너인 박우석 디렉터 님이 추구하는 요소들이 비정형적으로 흩어져 있는 상태에서 의견과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를 반복하며 개성적인 아이덴티티를 설정하고, 동시에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대중성도 갖고 있어야 할 그 어느 선상의 밸런스를 맞추는 것이 관건이었습니다. 19세기 영국 산업혁명 시대의 복식에 대한 관심을 기반으로, ‘소년’에서 출발했던 젠더의 모호함, 빈티지 안에서 느껴지는 우아한 캐주얼 브랜드로 방향성이 차츰 잡혀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아이덴티티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창구가 첫 번째 시즌의 룩북 이미지라고 생각했어요.

    몇 차례 전시 작업을 하면서 여러 재료를 다뤄봤던 경험이, 룩북 세트 디자인을 할 때 크게 도움이 되더라고요. 룩북 작업은 최소한의 예산과 재료로, 3일이라는 매우 짧은 기간 동안 진행했습니다. 너무 촉박해서 세트 설비 재료를 택배로 주문할 수가 없었어요. 배송 기간 때문에요. 그래서 이 지역 저 지역 400여 킬로미터를 직접 돌아다녀서 재료를 공수했습니다. 다행히도 타이밍이 오차 없이 잘 들어맞는 행운들 덕분에 최상의 효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세트 제작 때 시각적으로 가장 염려한 부분이 색감, 톤, 알맞은 질감과 빛이었거든요. 촬영 당일 포토그래퍼 님(원도스튜디오 원도연 실장님)이 마침내 셔터를 누르고, 콘셉트·세트·의상·모델·조명이 찰떡처럼 조화롭게 나온 사진을 제 눈으로 확인한 뒤에야 안도의 숨을 쉬었습니다.(웃음) 쉽지 않은 조건 속에서 모든 스태프 분들이 최선을 다해주신 덕에 원하던 것 이상의 비주얼이 나왔어요. 함께해준 분들께 정말 감사한 작업이었습니다.

    이 룩북을 계기로 우석 측에 좋은 홍보 기회들이 찾아왔다고 들었어요. 신생 패션 브랜드의 첫 시즌으론 드물게 성공적으로 발판을 다진 것 같아서 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단 한 장의 이미지라도 그 안에 명확하게 근본을 담아낸다면, 많은 이들과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사물의 언어’가 탄생하는 것이랄까요.

    그래픽 악보 [緣(연): You], 2014
    피아니스트 닐스 프람의 곡 「You」를 채보

    [그래픽 악보]라는 장기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신 걸로 압니다. “내가 들은 음악을 그냥 ‘느낌’으로만 표현하고 싶지 않아서”(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 유튜브 [조예 깊은 인터뷰] 중) 시작한 작업이지요? 그 결과물 중 하나가 [緣(연): You]라는 일종의 미디어 아트 작품이죠. 닐스 프람(Nils Frahm)이라는 피아니스트의 앨범 『Screws』 수록곡 「You」를 시각화한 그래픽 악보이고,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저도 이 앨범을 들어봤습니다. 첫 트랙 「You」와 마지막 트랙 「Me」 사이에 「Do」 「Re」 「Mi」 「Fa」 「Sol」 「La」 「Si」 7개 트랙이 놓여 있는 근사한 구성이더라고요. 실물 [緣: You]를 감상하지 못해 아쉽습니다.
    [그래픽 악보] 프로젝트는 어떤 형태로 발전시킬 계획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그래픽 악보]에 포함시키고 싶은 앨범이나 곡이 있다면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꼭 들어보겠습니다.(웃음)

    [緣: You]는 학교를 벗어나 처음 자발적으로 시작한 개인 프로젝트입니다. 음악을 기호로 시각화한 작업이에요. 순간의 감상에만 의존해 자의적인 이미지를 만들고 싶지 않다, 라는 것이 주안점이었습니다. 음악의 무드만 전달할 뿐인 기능적 이미지보다는, 의미를 생성해내는 효용성 있는 이미지의 구현을 고민했어요. 그러면서 시도한 방법이 음악의 기호화였습니다.

    [緣: You] 얘기를 좀더 하고 싶은데요. [緣: You]의 시작이자 주제는 ‘인연(因緣)’입니다. 저는 석사 때부터 인연 개념에 흥미를 느껴서 지금까지도 이 주제로 개인 작업들을 해 오고 있어요. 제갈선 작가와 전시했던 작업들도 모두 이 개념을 기반으로 합니다. 누군가가 제 인생관을 물으면 ‘인연’이라 답할 정도로, 인연 개념은 제 안에 깊이 흡수되어 있습니다. 저는 인연 개념을 단지 사람 사이에 연결된 관계의 끈이 아니라, ‘사물 사이에 일어나는 관계’, ‘서로 관계하며 원인이 되는 것’으로서 다룹니다. 그래픽 악보의 선정 음악, 시각 표현 방식, 방법론, 재료 등이 모두 이 개념과 상통해요. 어쩌면 작업의 근본에 집착하는 성향이 이때부터 시작이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웃음) 인연을 주제로 음악을 표현해보자, 라는 게 최초의 생각이었고 음악 선정은 그다음이었어요.

    아무 음악이나 다 듣기를 일주일쯤 했을 때, 우연한 계기로 작은 마켓에 갔다가 닐스 프람의 앨범 『Screws』를 발견했습니다. 에디터님이 언급하신 것처럼 트랙 리스트는 「You」를 시작으로 「Do」 「Re」 「Mi」 「Fa」 「Sol」 「La」 「Si」 그리고 마지막 7번 트랙 「Me」로 이루어져 있어요. ‘너와 나 사이가 음악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앨범의 메시지가 선명히 읽혔고, 제가 찾고 있던 인연의 의미와 일치한다고 생각했어요. 샘플도 없이 딱 한 개였던 앨범을 바로 사서 집으로 왔습니다. 오디오 트레이에 올리고 재생 버튼을 누르니, 제가 상상했던 딱 그 분위기의 피아노 곡이었습니다. 이 음악을 발견한 일은 지금까지도 신기한 경험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음악의 기호화는 조선시대 악보인 ‘정간보(井間譜)’를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닐스 프람의 음악을 오선 악보로 채보 후 정간보로 옮기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러고는 일련의 규칙을 설정해 ‘닐스 프람 정간보’를 기호화했어요. 정간보는 단 한 개 음만 표시할 수 있어요. 즉, 화음을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닐스 프람의 피아노 곡은 3개 음이 동시에 연주되는 음악이라 정간보로는 1·2·3장에 걸쳐 옮겼습니다. 이 세 장을 서로 비치도록 겹쳐서, 각 악보의 동일 구간 화음을 그래픽 기호로 표현하는 것이 제가 구상한 그래픽 악보의 형태였는데요. 하여, 악지(樂誌) 재료를 한지로 쓰고, 레이저 커팅으로 그래픽 요소를 타공하여 겹쳐진 악보의 기호들이 공간감 있게 1·2·3장을 관통하는 효과를 주었습니다. 그래픽 악보 [緣: You]의 음표 기호들은 마치 문자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본래 한자로 이루어진 정간보의 독음(讀音)을 음성 기호로 변환했기 때문이에요.

    [緣: You] 제작 기록: 실크스크린 실험

    [緣: You] 이후의 그래픽 악보는 앞으로 어떻게 발전시켜야 할까, 지금도 여러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중입니다. [緣: You]를 작업하며 실행해봤던 한지 타공, 실크스크린 실험 같은 다양한 방법론과 샘플 들이 많은데요. 이런 기술적 시도들을 포함한 악보 제작 과정을 프로세스북에 담아보는 계획도 갖고 있습니다. 영상 작업으로의 배리에이션 아이디어도 있고, 전시 구상도 해보고 있고, ······ 생각은 이렇게나 많은데 실행은 다 못하고 시간만 흐르네요.(웃음)

    우선은 기호화된 그래픽 요소들을 유연하고 재미있는 모습으로 리모델링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정간보의 격자 형식 그리드에서 변주를 줄 만한 프로세스를 개발해 전반적인 리듬감을 살려보는 작업도 할 예정이고요. 근본적인 개념에 충실해서 작업을 한 번 해보았으니, 이제는 시각적으로 좀더 매력을 더해줄 차례인 것 같습니다.

    그래픽 악보는 기본적으로 어떤 음악이든 다 그려낼 수 있어서, 제가 그때그때 끌리는 음악을 다 적용해볼 수 있는데요. 꼭 해보고 싶은 음악은 영화 〈달콤한인생〉 OST 2번 트랙인 ‘나의 슬픈 밤’입니다. 사실 이 곡은 두 번째 그래픽 악보의 선정 음악이었지만 과정과 결과에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 이 음악을 기준으로 그래픽 악보 시즌 2를 준비해볼까 합니다. 언제 완성될지는 장담 못하지만요.(웃음)

    [緣: You] 이후 미완의 두 번째 그래픽 악보, 2017

    스튜디오 ‘사물의 언어’와 디자이너/아티스트 양정은의 향후 3~4년간의 근미래 계획이 궁금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은 스튜디오를 정비하고 ‘내 것’을 찾아가는 시간입니다. 덕분에 저도 디자이너, 아티스트로서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정리하는 기회를 갖게 된 것 같아요. 올해 ‘사물의 언어’에는 아마도 새 식구가 몇 명 생길 수도 있을 것 같고요. 클라이언트와의 작업뿐 아니라 ‘사물의 언어’만의 다양한 시각적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함께 고군분투할 예정입니다.

    앞으로 3~4년 동안은 지금 설정하고 있는 저의 방향성이나 새로 시작한 일들이 자리를 잘 잡아가는지, 바르게 걸어가고 있는지 계속 검토하고 뿌리를 다지는 기간일 듯합니다. 4년 후쯤에는 양정은이라는 사람 앞에 어떤 수식어가 붙을 수 있을까, 설레고 궁금합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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