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조스튜디오는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이자 독립 출판사다. 평균대 위 체조처럼 여러 요소들의 균형으로써 일련의 동작을 완료하고 비로소 착지하는, 그런 작업론을 반영한 이름이다. 운영 주체는 두 디자이너, 강아름과 이정은이다. 이들은 ‘집 안의 사소한 사물을 탐구하는’ 매거진 『사물함(Samulham)』을 만든다. 『사물함』은 2017년 마포디자인·출판지원센터(현 WhatReallyMatters) 우수콘텐츠지원사업 선정 프로젝트였고, 체조스튜디오라는 이름을 알린 대표작이기도 하다.
누구나의 집에 존재할 어떤 사물을 가만히, 매 호 한 가지 사물만을 골똘히 바라보기. 『사물함』의 콘셉트를 개략하면 이러하다. 2017년 창간호는 ‘조명’을 다뤘다. 이후 ‘베개’, ‘밀폐용기’, ‘월경 용품’, ‘창문’ 등이 『사물함』의 각 호마다 놓이고 있다. 디자인 저술가 전가경은 이렇게 호평했다. “당연히 사물이란 것은 어떤 특별한 역할과 기능을 부여 받은 물건이지만, 삶 속에 녹아들면 하나의 기호로 성장한다. 『사물함』을 만들고 동시에 본다는 것은 어쩌면 ‘기호’로부터 사물을 해방시키는 것일까, 혹은 더 많은 기호로서의 사물을 생산하는 작업일까. 이 질문들 사이에 『사물함』은 유연하게 자리해 있는 인상이다.”
에디터도 설은 평을 보태본다. 내 곁에 사물이, 그러니까 매거진 한 권 분량만큼의 세계가 놓여 있었음을 깨닫는 경험. 그런 세계들/사물들의 총합이 바로 나의 일상다반사였음을 실감하는 각성. 『사물함』은 독자들의 세계를, 그리고 세계관을 ‘볼만하게’ 디자인해주는 기획물이다.
몇 권의 『사물함』을 소장하고 있던 것이 이번 인터뷰의 계기다. 쑥스러운 말이나, 『사물함』 속 사물들보다 그 주인들이 더 궁금했다. 『사물함』이 사물을 들여다보듯, 인터뷰 자리에서나마 『사물함』의 주인들을 바라보고 싶었다. 두 디자이너는 어떤 사물들에, 어떤 세계에 둘러싸여 생활하고 있을지 짐작해보면서.
그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 매거진 『사물함』이 소개되었습니다. 이번 인터뷰도 『사물함』 이야기의 연장이 될 것 같네요. 다만, 매거진 자체보다는 매거진을 만드는 ‘체조스튜디오 강아름·이정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사물함』의 ‘질문들’ 코너 말입니다. 권두언 혹은 편집자의 말에 해당하는 꼭지인데, 한 편의 산문이 아니라 몇 개의 질문들로 구성돼 있어요. 이 의문문들이 독자를(적어도 제 자신을) 『사물함』 안에 붙잡아두는 느낌이에요. 가령 ‘창문’을 주제로 한 5호에 이런 질문이 나와요. “당신은 창문으로 무엇을 보는가.”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저는 이 짧은 문장이 마치 스님들의 화두처럼 머릿속을 떠나질 않더라고요. 뭔가를 ‘본다’는 인식을 갖고 창밖을 응시했던 적이 과연 있었나, 하는 성찰(?)을 했습니다.
‘질문들’ 코너로 얼마간 사색적이게 된 덕분에, 『사물함』의 모든 페이지―텍스트와 그림과 사진―를 시간을 들여 바라봤던 것 같아요. 『사물함』이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게 아니라, 어느 틈엔가 독자 스스로 자신의 사물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해보게 되는, 이런 정서 작용이 일었습니다.
그런데 체조스튜디오가 출판사 겸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잖아요. 그러니까, 『사물함』처럼 책을 매개로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출판사이면서, 클라이언트의 의뢰에 ‘답(솔루션)’을 내놓아야 하는 스튜디오이기도 한 셈입니다. 두 작업의 결이 상당히 달라 보이거든요. 디자이너 내면의 태세 전환이랄까, 업무 프로세스의 변환이랄까, 이런 게 급격하지 않을까 싶은데(웃음), 실제로는 어떠세요?
클라이언트와 함께 일을 할 때도 『사물함』을 만들 때의 태도를 가지고 가는 것 같아요. 저희가 적극적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의견도 내면서요. 아무래도 저희에게 일을 주시는 분들이 『사물함』을 보고 연락을 주시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어느 정도 그런 태도를 원하기도 하시고요. 저희가 일을 하면서 계속 추구하고 싶은 부분이기도 해요. 디자인 스튜디오이면서 기획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함께 가지고 가는 것이 저희가 바라는 방향이에요.
‘COLUMNED’는 〈大會〉의 영어 전시명이다.
스튜디오로서의 활동에 대해 하나만 더 질문 드릴게요. ‘농부시장 마르쉐(Marché)’라는 농산물 직판장의 출점 마켓들을 대상으로 브랜딩 작업을 진행했잖아요. 각 마켓의 농업인 분들은 어떤 니즈를 갖고 계셨을지, 체조스튜디오는 주안점을 어디에 두고서 그분들의 니즈를 충족해드렸을지 궁금합니다.
작업을 하기 전에 많은 대화를 나눴던 것 같아요. 저희가 필요한 것을 묻는 게 아니라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농부님들이 농사를 하는 방식이나 어떻게 생산부터 판매까지 하고 계시는지, 어떤 삶을 살고 계시는지 궁금했거든요. ‘자란다팜’의 경우, 부부 두 분이서 농지에서 다양한 작물을 조금씩 길러서 팔고 계셨는데, 그렇기 때문에 채소를 특정 짓기 어려웠어요. 그때그때 마르쉐에 가지고 오는 작물들이 달랐죠.
저희는 이걸 이용해서 계절마다 바뀌는 간판으로 로고를 대신하기로 했어요. 농부님들도 사람들에게 자란다팜의 이미지를 하나만 심어주는 것보다 계절이 바뀌는 걸 보여줄 수 있다고, 그게 우리 같다며 좋아하셨어요. 저희도 계절마다 바뀌는 간판을 볼 때마다 ‘아 벌써 이 계절이 왔네’ 느낄 수도 있고, 장에 나오실 때마다 간판을 고르는 농부님들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져요.
‘콩항아리’ 농부님은 원하는 게 명확하셨어요. 집에서 장을 만드는데 이걸 유통하고 판매해야 하니까 일단 패키지와 상품 설명 같은 게 실질적으로 필요했던 거예요. 저희가 처음에는 유리병과 하나하나 묶어야 하는 택(tag)을 제안해드렸는데, 결국 이 아이디어는 제거하기로 했어요. 농부님이 시간이 항상 부족하고 패키지에 신경을 쓸 수 없어서 포장이 빠르고 가벼운 용기를 원하셨거든요. 그래서, 대신 패브릭을 이용해서 어디든 걸쳐두고 걸어둘 수 있는 간판과 다양한 스티커를 작업했어요.
다시 『사물함』 얘기를 이어가볼게요. 본래 비정기 간행물이었다가 2021년 상반기호(5호)부터 반연간지로 전환된 걸로 압니다. 1년에 두 번이라 해도 제작 품이 상당히 들 것 같아요. 매 호마다 메인 포토그래퍼와 기고 작가를 섭외하는 일이 만만찮겠다고 감히(?) 추측해봅니다. 독자 투고작(‘당신의 사물을 그려주세요’ 코너에 실리는 독자들의 사물 드로잉)을 선별하는 작업도 꽤 오래 걸릴 듯하고요. 그래서 궁금한 건데요··· 『사물함』 한 호는 보통 어떤 단계를 거쳐서 완성되나요?
둘이서 하기에 버거운 감이 없지 않아 있어요. 말씀하신 대로 기획, 섭외, 디자인 등 모든 단계를 저희가 직접 컨트롤하기 때문에 사실은 시기에 잘 맞춰 책을 내는 일이 만만찮아요. 저희가 보통 거치는 단계는, 이번 호를 만들면서부터 다음 호를 생각하는 거예요.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생각이 이어지는데요. 이번엔 이런 얘기를 다루었으니 다음엔 이런 얘기를 해보면 좋겠다, 하는 식으로요. 그렇게 생각해놓은 ‘사물’들이 벌써 열 개도 넘어요.
사물이 먼저 정해지면 거기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이 있을지 회의하기 시작해요.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나열하다 보면 이 이야기는 사진이 좋겠네, 글이 좋겠네, 이런 식으로 분류가 돼요. 사진도 글도 아닌데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다른 기획을 하기도 하고요. 분류가 끝나면 동시다발로 진행이 되는데요. 역사와 종류 리서치부터 작가 섭외, ‘당신의 사물을 그려주세요’ 그림 받기 등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알아서 찾아 하는 식이에요. 원고는 받는 대로 번역과 교열이 들어가고, 마지막 단계가 오면 처음 그린 책의 얼개를 다시 상기하면서 흐름을 확정 지어요.
(캡슐컬렉션: 계절별로 대량 발표되는 정규컬렉션과 달리, 특정 시기를 정해두지 않고 소량의 제품들을 선보이는 컬렉션)
두 분 모두 프랑스(강아름)와 일본(이정은)에서 유학 생활을 했고, 지금은 ‘라이프 스타일’ 범주에 속할 만한 매거진을 제작 중입니다. 이를 근거로 허무한 질문 하나 드려보겠습니다.(웃음) 프랑스·일본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들여다볼 수 있는 각 현지의 뛰어난 매거진 몇 가지만 추천해주실 수 있을까요?
정은
라이프 스타일 매거진을 잘 안봐서 잘 모르지만 제가 여전히 가끔 들여다보는 매거진은 『Brutus』예요. 주제가 정말 방대해요. 책방이거나 어느 인물이거나 도시이거나 돈가스, 재정, 고양이 등등 참으로 다채로운 매거진이에요.
아름
저는 프랑스에 살면서 매거진을 거의 안 본 쪽에 가까워요. 다양한 매거진이 있지만 제 전공 분야가 아니면 매거진은 아예 들춰보지 도 않았어요. 친구들, 홈스테이 가족의 집에 가서 구경하고 살펴본 것들이 저에게 커다란 인풋이 되어서 그걸로도 충분했던 것 같네요.
정지용은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라고 쓰며 「유리창」이라는 시를 시작했다. 차고 슬픈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의 입김이리라. 유리창에 붙어 뭔가 말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입김이다. 그러나 그 말은 유리창을 넘어가지 못한다.
(···)
내 언어가 가 닿을 수 있는 가장 먼 곳에 글쓰기 창이 있다. 이 창 안쪽에서 나는 뭔가를 쓰고 또 지운다. 그러는 동안 자책하고 망설이고 환호하고 기뻐한다. 대개의 글은 정지용의 입김처럼 그 창을 넘지 못하고 사라진다. 그게 글쓰기의 본질이다. 하지만 어떤 글들은 그 창을 지나 누군가에게 가 닿는다. 나의 가장 먼 곳과 타인의 가장 가까운 곳과 만나는 경계에서 그런 식으로 의사소통이 일어난다.
『사물함』 5호에 수록된 소설가 김연수의 글 「거울이 아니라 창에서 글쓰기」 중
소설가에게 ‘글쓰기 창’이 있듯이 디자이너에게도 ‘디자인 창’이 있겠지요? 강아름·이정은 디자이너가 ’디자인 창’ 너머 가 닿고 싶은 존재는 무엇일지(누구일지) 궁금해요.
아름
저를 둘러싼 외부 세계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더 나아가면 결국 ‘나’이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이야기를 좋아해요. 실재하는 타인의 삶이나 영화, 책 속에 들어 있는 상상 속 인물들의 삶을 구경하면 그 관점에서 생각해보게 되고, 그런 경험을 통해 제가 넓어지는 것 같아요. 같은 이야기도 제가 살아가는 시기마다 새롭게 느껴지잖아요. 거기에서 배우고 변화하는 것 같아요. 그것들과의 관계를 계속 넓히고 싶은 게 제가 바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사물함』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이기도 하고요.
정은
저와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요. 모든 사람과 다 연결이 되어 있겠지만 굳이 범주를 정한다면 ‘가까운 사람들’요.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타인과 나의 관계가 제일 흥미로운 것 같아요. 관계 또한 변화할 수밖에 없는데 저는 그 변화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이에요. 타인과 나의 관계를 열심히 해석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이 객관적으로 보일 때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저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에 게을러지고 싶지 않아요.
『타이포그래피 서울』이 「인터뷰 애프터뷰(interVIEW afterVIEW)」라는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과거 인터뷰이를 다시 만나는 인터뷰 꼭지예요. 무려 8~9년 만에 재회한 디자이너들도 있습니다. 타 매체의 체조스튜디오 인터뷰에서 “할머니가 되어서도 디자인을 하고 싶다”는 두 분의 바람을 눈여겨봤습니다.(웃음) 만약 30년 후에 「인터뷰 애프터뷰」를 진행한다면, 그때 강아름·이정은 디자이너의 작업실엔 어떤 사물들이 놓여 있을까요?
정은
지금과 비슷할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30년 후니까 각종 군것질거리, 어느 젊은 작가의 소설집···?
아름
편안한 의자 여러 개랑, 그때까지 죽이지만 않는다면 지금 키우고 있는 식물들이지 않을까 싶어요.